영화, 무대 위로 뛰어오르다 영화 원작 뮤지컬 '무비컬' 제작 붐
본문
[필름 2.0 2007-02-02 18:00]
<댄서의 순정> <싱글즈> <은행나무 침대> <내 마음의 풍금>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신부수업>은 더 이상 영화 제목이 아니다. 스크린에서 뛰쳐나와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할 뮤지컬 제목들이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한국영화가 잇달아 대박을 터뜨리더니, 이번에는 공연계에 한국영화의 뮤지컬화 바람이 불고 있다. 이름하여 \'무비컬\',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자, 손동작은 좀 더 부드럽게! 턴은 최대한 빠르게!” 다부져 보이는 강사의 시범을 지켜본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와 최대한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댄스 교습소 현장이 아니다. 3월 29일부터 서울 삼성동의 백암 아트홀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댄서의 순정>의 연습실 풍경이다. 문근영이 나온 그 <댄서의 순정>? 맞다. 하지만 문근영과 박건형은 안 나온다. 영사기도 없다. 새로운 배우들은 화면이 아닌 무대에서 살아 숨 쉬며 노래하고 춤춘다.
바야흐로 ‘한국 무비컬’의 원년이 시작됐다. \'무비컬\'은 최근 뮤지컬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단어. \'무비\'와 \'뮤지컬\'을 합친,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을 뜻한다. 이 단어가 올해 특히 더 많이 등장하게 될 전망이다. 과거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뮤지컬로 만들어진 적이 있지만, 올해처럼 많은 작품이 제작되기는 처음이다. 가장 이른 3월 29일 무대에 올라가는 <댄서의 순정>은 현재 캐스팅을 완료하고 본격 연습에 돌입한 상태. 영화를 제작했던 컬처캡미디어가 뮤지컬 역시 직접 제작한다. 6월 8일 시작되는 악어컴퍼니의 <싱글즈>는 절반 정도의 캐스팅을 마치고 음악작업에 한창이다. <은행나무 침대>도 준비 단계에 있다. 7월 20일에는 쇼틱의 <내 마음의 풍금>이 무대에 오를 예정. 이밖에 PMC프로덕션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신부수업> 등 2007년 뮤지컬 라인업에 익숙한 영화들의 제목이 대거 합세한다. 지난해 충무로가 뮤지컬영화들을 잇달아 선보인 데 대한 뮤지컬업계의 화답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비컬은 공연계에 하나의 경향으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가 무대로 간 까닭은
뮤지컬의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앤드에서도 무비컬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90년대 중반 디즈니가 <미녀와 야수>와 <라이온 킹>을 무대에 올려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많은 제작사들이 공연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프로듀서스>와 <빌리 엘리어트>가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뉴욕 타임스\'가 한때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중 절반이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고 전할 만큼 영화와 뮤지컬은 과거 할리우드 뮤지컬영화의 전성기 이후 다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그렇다고 올해 국내에서 두드러진 무비컬 현상을 이런 해외에서의 유행을 답습하는 차원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선 태생이나 규모 면에서 국내와 해외 뮤지컬시장은 큰 차이가 있다.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한 수입 뮤지컬들에 힘입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국내 뮤지컬시장은 대규모 관객을 불러 모으고 선진 시스템을 벤치마킹할 수 있었던 반면, 과당 경쟁으로 판권가격이 지나치게 오르고, 관람료도 함께 오르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하나둘씩 만들어지기 시작한 창작 뮤지컬은 장마가 그치고 솟아난 작은 새싹과 같이 소중한 것이었다. 이후 많은 창작 뮤지컬이 만들어졌고 몇몇 작품들은 해외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컬처캡미디어의 주봉석 PD는 지금의 상황을 “한국 뮤지컬의 빅뱅이 시작됐다”는 말로 표현한다. \'빅뱅\'에 걸맞는 소재와 창작 인력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아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같은 현실은 이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영화 쪽으로 돌리게 했다. 한국영화가 무대에서 검증된 소재를 발굴해냈듯, 공연계 역시 극장가에서 검증된 한국영화의 참신한 소재와 감성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댄서의 순정>은 국내 최초의 ‘댄스 스포츠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익숙한 새로움을 안겨준다. 영화의 이야기를 가져오면서 댄스 스포츠라는, 다분히 뮤지컬적인 소재를 발견한 경우다. 또 해외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빌리 엘리어트>와 <더티 댄싱>과 마찬가지로 영화에 춤과 노래가 녹아들어 있다는 것은 뮤지컬화에 무엇보다 유리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아직 극장 상영도 끝나지 않은 <미녀는 괴로워>에 많은 뮤지컬 업계가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상황도 같은 맥락이다. \'성형\'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소재에, 주 문화소비층인 20~30대 여성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으니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싱글즈>나 <내 마음의 풍금>은 드라마의 감성적인 부분이 뮤지컬화의 원동력이 됐다. <싱글즈>를 제작하고 있는 조행덕 악어컴퍼니 대표는 “일과 사랑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는 화두는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면서, \"그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4명의 캐릭터들이 아기자기한 드라마를 이어가다 끝에 가서는 탁 터지는 감정을 준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의 풍금>의 제작자인 쇼틱의 김종헌 대표도 “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풍금을 반주로 노래하는 장면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매력으로 꼽으며 원작 영화를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작품 선정의 이유는 다르지만 이들의 생각에 공통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역시 원작이 가진 매력과 지명도다. 따지고 보면 제작자들도 기획 단계 이전에는 이들 영화의 관객이었다. “창작 뮤지컬인 <천사의 발톱>을 직접 본 관객들의 평은 좋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떤 작품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직 기대만큼 티켓이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조행덕 대표의 걱정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초기 흥행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에 대한 역설로 들린다. 창작 뮤지컬의 가장 큰 고민이 투자사 찾기와 홍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제작준비 단계 전에 이미 시장에 인지도가 있다는 점은 두 가지 고민의 상당부분을 덜 수 있게 해준다. 뮤지컬 팬과 일반 관객을 넘어 편당 최소 1백만 명이 넘는 영화팬들이 자연스럽게 마케팅 대상의 영역으로 흡수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플러스 알파가 성공의 열쇠
하지만 원작의 이름값은 양날의 칼이 되기도 한다. 최원철, 유진과 함께 더블캐스팅된 <댄서의 순정>의 최성원, 양소민 씨는 “영화의 유명세에 대한 부담”을 제일 먼저 토로한다. 뮤지컬 경험이 많은 배우들조차 “원작과 비교 아닌 비교를 당할까봐”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의 재창조는 제작자와 배우들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겨준다. 이 부분은 문학이나 만화를 영화화했던 영화제작자들이 느꼈던 부담감과 마찬가지다. 원작을 너무 충실하게 반영하거나, 너무 많은 각색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팬들의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은 한결같이 “영화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다”고 말한다. 이번처럼 원작의 유명세가 클 경우에는 오히려 관객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가 더 까다롭기 때문. 공연방식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몇 배나 더 비싼 티켓가격도 높은 기대감을 부풀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전술은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략은 하나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느낀 재미와 감동을 넘어선 또 다른 무언가를 줘야 한다는 것. <댄서의 순정>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댄스 스포츠의 화려함, <싱글즈>는 드라마적 공감대와 볼거리의 동시만족, <내 마음의 풍금>은 가수 조규찬의 작곡과 아름다운 무대구성 등을 핵심요소로 잡고 있다. 해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실제 아역배우가 연기한, 와이어를 이용한 백조의 호수 장면과 후반부 하이라이트인 20회 연속 회전 동작의 마무리 등 눈앞에서 펼쳐진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영화를 넘어서는 박수와 환호를 이끌어낸 경우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차이도 간과하기 힘든 부분이다. 특히 <댄서의 순정>은 댄스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기술적인 차이가 더 크게 와 닿는다. “영화는 편집과 클로즈업이라는 기술이 있지만 뮤지컬은 장면마다 모든 요소를 구성해서 통째로 보여줘야 된다. 춤 같은 경우 영화에서는 영상기법을 통해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뮤지컬은 그게 안 된다. 한 번의 실수를 하더라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 배우들의 연습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봉석 PD는 말한다. 편집과 클로즈업은 드라마가 중요한 뮤지컬에서도 큰 차이를 만든다. 영화는 배우의 감정이나 전체적인 갈등구조가 변화될 때 클로즈업이나 교차편집을 통해 한 부분을 심화시킬 수 있지만 뮤지컬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의 모든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좀 더 깊어지고 강하게” 각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배우들도 원작 영화의 캐릭터와 닮기 위한 노력보다 각본에 따라 나름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더욱 집중한다.
그래도 뮤지컬이다
이런 내적인 고민거리보다 더 큰 문제는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다. 아무리 좋은 소재와 검증된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해도 뮤지컬에는 노래와 춤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해외에도 좋은 원작을 가지고 시작했던 무비컬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막을 내린 수많은 사례가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뮤지컬시장에서 무비컬은 창작 뮤지컬이 가졌던 일반적인 고민을 그대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 다른 창작 뮤지컬뿐만 아니라 꾸준히 상륙하는 수입 뮤지컬과의 경쟁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형화하고 산업화한 최근 뮤지컬시장과 뮤지컬동호회에 올라오는 평론가 수준의 공연 후기 등은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 뮤지컬이 안정된 소재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쇼틱 김종헌 대표는 “레미제라블이 지금은 유명하지만 소설만으로 존재했을 당시 작품에 뮤지컬스러운 요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결국 뮤지컬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드라마를 뮤지컬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재창조해내야 한다는 얘기다.
올해 제작되는 무비컬들의 성공여부는 앞으로 뮤지컬시장의 판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MGM, 워너브러더스 등 많은 제작사들이 뮤지컬 전담회사를 설립한 상태다. 개봉이 끝나고 판권이 모두 팔리고 나면 더 이상 수익을 내기 힘든 영화시장과 달리, 뮤지컬시장은 잘 만든 한 편으로 장기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 판권을 가진 영화사들이 성공사례를 따르리라는 것은 어려운 예상이 아니다. 김종헌 대표는 두 시장의 차이를 “100미터 달리기와 마라톤”에 비유한다. “단거리에 익숙한 제작사가 무턱대고 장거리 경주에 뛰어들었다가 당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성공사례가 쌓이고 새로운 시스템이 잘 구축된다면 영화업계와 뮤지컬업계 모두에게 많은 발전과 수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창작 뮤지컬 중 가장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을 <명성황후>는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 초연을 하고 시장에 자리를 잡는 데만 3년 안팎의 시간이 걸리는 시장인 만큼 장기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수조건이다. <댄서의 순정>의 연습을 막 마친 배우 최성원이 땀도 마르지 않은 채 말한다. \"좋은 창작 뮤지컬이 많이 나와서 영화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면 해요.” 이들의 땀방울에 정당한 결실이 맺어지기를 기대한다.
“노래로 드라마를 이해하는 게 뮤지컬이다”
뮤지컬 <댄서의 순정> 주봉석 제작 프로듀서 인터뷰
영화를 제작하면서 동시에 뮤지컬화를 생각한 건가?
영화 기획 당시 뮤지컬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 5월 말부터 뮤지컬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일단 컬처캡미디어는 영화제작사이기 때문에 뮤지컬 쪽 인력이 없었다. 그래서 논의 이후 대표가 뮤지컬 프로덕션을 찾고 있었는데 딱히 찾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9월부터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작가가 각색작업을 시작했다.
뮤지컬화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댄서의 순정>은 댄스 스포츠를 소재로 했던 영화이고 댄스 스포츠 자체가 매력적인 춤이다. 굉장히 화려하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도 충분히 볼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가 간단하다.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드라마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렇다면 댄스 스포츠를 실제로 하는 분들이 많이 캐스팅됐나?
오디션 때 댄스 스포츠 쪽으로 많이 공고를 보냈는데 사실 댄스 스포츠만 잘한다고 뽑을 수가 없더라. 앙상블 쪽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노래도 잘해야하고 뮤지컬 전체의 안무에 대한 감각도 있어야 되고 연기도 물론 돼야 한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댄스 스포츠 선수분들은 참여를 거의 못 하게 됐다. 뮤지컬 배우들이 댄스 스포츠 안무가에게 1월부터 배우고 있다. 뮤지컬 안무가는 또 따로 있다.
캐릭터가 달라진 부분이 있나?
일단 주인공이 달라지고 뮤지컬인 만큼 캐릭터에 변화가 있다. 채린 역할은 가수이자 연기자인 유진과 뮤지컬배우 양소민 씨가, 영새 역할은 최원철, 최성원 씨가 맡았다. 영화에서 채린은 캐릭터가 굉장히 명확한데 영새가 조금 어중간해서 그 부분을 좀 살리고 악역인 현수도 좀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에 이름만 등장하는 영새의 옛 연인 세영이 뮤지컬에서는 실제로 등장한다.
제작하는 입장에서 목표가 뭔가?
영화 팬들은 드라마를 본다. 뮤지컬 팬들은 노래를 듣는다. 그 두 가지가 다 충족되면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사를 가사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가능한 대사를 노래로 풀자. 함축적인 가사로 노래해서 관객이 드라마를 따라갈 수 있다면 성공이다. 그게 뮤지컬이다.
사진 김수홍
문성원 기자
<댄서의 순정> <싱글즈> <은행나무 침대> <내 마음의 풍금>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신부수업>은 더 이상 영화 제목이 아니다. 스크린에서 뛰쳐나와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할 뮤지컬 제목들이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한국영화가 잇달아 대박을 터뜨리더니, 이번에는 공연계에 한국영화의 뮤지컬화 바람이 불고 있다. 이름하여 \'무비컬\',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자, 손동작은 좀 더 부드럽게! 턴은 최대한 빠르게!” 다부져 보이는 강사의 시범을 지켜본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와 최대한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댄스 교습소 현장이 아니다. 3월 29일부터 서울 삼성동의 백암 아트홀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댄서의 순정>의 연습실 풍경이다. 문근영이 나온 그 <댄서의 순정>? 맞다. 하지만 문근영과 박건형은 안 나온다. 영사기도 없다. 새로운 배우들은 화면이 아닌 무대에서 살아 숨 쉬며 노래하고 춤춘다.
바야흐로 ‘한국 무비컬’의 원년이 시작됐다. \'무비컬\'은 최근 뮤지컬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단어. \'무비\'와 \'뮤지컬\'을 합친,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을 뜻한다. 이 단어가 올해 특히 더 많이 등장하게 될 전망이다. 과거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뮤지컬로 만들어진 적이 있지만, 올해처럼 많은 작품이 제작되기는 처음이다. 가장 이른 3월 29일 무대에 올라가는 <댄서의 순정>은 현재 캐스팅을 완료하고 본격 연습에 돌입한 상태. 영화를 제작했던 컬처캡미디어가 뮤지컬 역시 직접 제작한다. 6월 8일 시작되는 악어컴퍼니의 <싱글즈>는 절반 정도의 캐스팅을 마치고 음악작업에 한창이다. <은행나무 침대>도 준비 단계에 있다. 7월 20일에는 쇼틱의 <내 마음의 풍금>이 무대에 오를 예정. 이밖에 PMC프로덕션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신부수업> 등 2007년 뮤지컬 라인업에 익숙한 영화들의 제목이 대거 합세한다. 지난해 충무로가 뮤지컬영화들을 잇달아 선보인 데 대한 뮤지컬업계의 화답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비컬은 공연계에 하나의 경향으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가 무대로 간 까닭은
뮤지컬의 본가라고 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앤드에서도 무비컬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90년대 중반 디즈니가 <미녀와 야수>와 <라이온 킹>을 무대에 올려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많은 제작사들이 공연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프로듀서스>와 <빌리 엘리어트>가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뉴욕 타임스\'가 한때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중 절반이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고 전할 만큼 영화와 뮤지컬은 과거 할리우드 뮤지컬영화의 전성기 이후 다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그렇다고 올해 국내에서 두드러진 무비컬 현상을 이런 해외에서의 유행을 답습하는 차원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선 태생이나 규모 면에서 국내와 해외 뮤지컬시장은 큰 차이가 있다.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한 수입 뮤지컬들에 힘입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국내 뮤지컬시장은 대규모 관객을 불러 모으고 선진 시스템을 벤치마킹할 수 있었던 반면, 과당 경쟁으로 판권가격이 지나치게 오르고, 관람료도 함께 오르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하나둘씩 만들어지기 시작한 창작 뮤지컬은 장마가 그치고 솟아난 작은 새싹과 같이 소중한 것이었다. 이후 많은 창작 뮤지컬이 만들어졌고 몇몇 작품들은 해외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컬처캡미디어의 주봉석 PD는 지금의 상황을 “한국 뮤지컬의 빅뱅이 시작됐다”는 말로 표현한다. \'빅뱅\'에 걸맞는 소재와 창작 인력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아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같은 현실은 이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영화 쪽으로 돌리게 했다. 한국영화가 무대에서 검증된 소재를 발굴해냈듯, 공연계 역시 극장가에서 검증된 한국영화의 참신한 소재와 감성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댄서의 순정>은 국내 최초의 ‘댄스 스포츠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익숙한 새로움을 안겨준다. 영화의 이야기를 가져오면서 댄스 스포츠라는, 다분히 뮤지컬적인 소재를 발견한 경우다. 또 해외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빌리 엘리어트>와 <더티 댄싱>과 마찬가지로 영화에 춤과 노래가 녹아들어 있다는 것은 뮤지컬화에 무엇보다 유리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아직 극장 상영도 끝나지 않은 <미녀는 괴로워>에 많은 뮤지컬 업계가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상황도 같은 맥락이다. \'성형\'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소재에, 주 문화소비층인 20~30대 여성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으니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싱글즈>나 <내 마음의 풍금>은 드라마의 감성적인 부분이 뮤지컬화의 원동력이 됐다. <싱글즈>를 제작하고 있는 조행덕 악어컴퍼니 대표는 “일과 사랑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는 화두는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면서, \"그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4명의 캐릭터들이 아기자기한 드라마를 이어가다 끝에 가서는 탁 터지는 감정을 준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의 풍금>의 제작자인 쇼틱의 김종헌 대표도 “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풍금을 반주로 노래하는 장면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매력으로 꼽으며 원작 영화를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작품 선정의 이유는 다르지만 이들의 생각에 공통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역시 원작이 가진 매력과 지명도다. 따지고 보면 제작자들도 기획 단계 이전에는 이들 영화의 관객이었다. “창작 뮤지컬인 <천사의 발톱>을 직접 본 관객들의 평은 좋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떤 작품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직 기대만큼 티켓이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조행덕 대표의 걱정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초기 흥행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에 대한 역설로 들린다. 창작 뮤지컬의 가장 큰 고민이 투자사 찾기와 홍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제작준비 단계 전에 이미 시장에 인지도가 있다는 점은 두 가지 고민의 상당부분을 덜 수 있게 해준다. 뮤지컬 팬과 일반 관객을 넘어 편당 최소 1백만 명이 넘는 영화팬들이 자연스럽게 마케팅 대상의 영역으로 흡수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플러스 알파가 성공의 열쇠
하지만 원작의 이름값은 양날의 칼이 되기도 한다. 최원철, 유진과 함께 더블캐스팅된 <댄서의 순정>의 최성원, 양소민 씨는 “영화의 유명세에 대한 부담”을 제일 먼저 토로한다. 뮤지컬 경험이 많은 배우들조차 “원작과 비교 아닌 비교를 당할까봐”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의 재창조는 제작자와 배우들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겨준다. 이 부분은 문학이나 만화를 영화화했던 영화제작자들이 느꼈던 부담감과 마찬가지다. 원작을 너무 충실하게 반영하거나, 너무 많은 각색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팬들의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은 한결같이 “영화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다”고 말한다. 이번처럼 원작의 유명세가 클 경우에는 오히려 관객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가 더 까다롭기 때문. 공연방식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몇 배나 더 비싼 티켓가격도 높은 기대감을 부풀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전술은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략은 하나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느낀 재미와 감동을 넘어선 또 다른 무언가를 줘야 한다는 것. <댄서의 순정>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댄스 스포츠의 화려함, <싱글즈>는 드라마적 공감대와 볼거리의 동시만족, <내 마음의 풍금>은 가수 조규찬의 작곡과 아름다운 무대구성 등을 핵심요소로 잡고 있다. 해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실제 아역배우가 연기한, 와이어를 이용한 백조의 호수 장면과 후반부 하이라이트인 20회 연속 회전 동작의 마무리 등 눈앞에서 펼쳐진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영화를 넘어서는 박수와 환호를 이끌어낸 경우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차이도 간과하기 힘든 부분이다. 특히 <댄서의 순정>은 댄스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기술적인 차이가 더 크게 와 닿는다. “영화는 편집과 클로즈업이라는 기술이 있지만 뮤지컬은 장면마다 모든 요소를 구성해서 통째로 보여줘야 된다. 춤 같은 경우 영화에서는 영상기법을 통해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뮤지컬은 그게 안 된다. 한 번의 실수를 하더라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 배우들의 연습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봉석 PD는 말한다. 편집과 클로즈업은 드라마가 중요한 뮤지컬에서도 큰 차이를 만든다. 영화는 배우의 감정이나 전체적인 갈등구조가 변화될 때 클로즈업이나 교차편집을 통해 한 부분을 심화시킬 수 있지만 뮤지컬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의 모든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좀 더 깊어지고 강하게” 각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배우들도 원작 영화의 캐릭터와 닮기 위한 노력보다 각본에 따라 나름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더욱 집중한다.
그래도 뮤지컬이다
이런 내적인 고민거리보다 더 큰 문제는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다. 아무리 좋은 소재와 검증된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해도 뮤지컬에는 노래와 춤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해외에도 좋은 원작을 가지고 시작했던 무비컬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막을 내린 수많은 사례가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뮤지컬시장에서 무비컬은 창작 뮤지컬이 가졌던 일반적인 고민을 그대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 다른 창작 뮤지컬뿐만 아니라 꾸준히 상륙하는 수입 뮤지컬과의 경쟁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형화하고 산업화한 최근 뮤지컬시장과 뮤지컬동호회에 올라오는 평론가 수준의 공연 후기 등은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 뮤지컬이 안정된 소재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쇼틱 김종헌 대표는 “레미제라블이 지금은 유명하지만 소설만으로 존재했을 당시 작품에 뮤지컬스러운 요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결국 뮤지컬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드라마를 뮤지컬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재창조해내야 한다는 얘기다.
올해 제작되는 무비컬들의 성공여부는 앞으로 뮤지컬시장의 판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MGM, 워너브러더스 등 많은 제작사들이 뮤지컬 전담회사를 설립한 상태다. 개봉이 끝나고 판권이 모두 팔리고 나면 더 이상 수익을 내기 힘든 영화시장과 달리, 뮤지컬시장은 잘 만든 한 편으로 장기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 판권을 가진 영화사들이 성공사례를 따르리라는 것은 어려운 예상이 아니다. 김종헌 대표는 두 시장의 차이를 “100미터 달리기와 마라톤”에 비유한다. “단거리에 익숙한 제작사가 무턱대고 장거리 경주에 뛰어들었다가 당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성공사례가 쌓이고 새로운 시스템이 잘 구축된다면 영화업계와 뮤지컬업계 모두에게 많은 발전과 수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창작 뮤지컬 중 가장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을 <명성황후>는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 초연을 하고 시장에 자리를 잡는 데만 3년 안팎의 시간이 걸리는 시장인 만큼 장기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수조건이다. <댄서의 순정>의 연습을 막 마친 배우 최성원이 땀도 마르지 않은 채 말한다. \"좋은 창작 뮤지컬이 많이 나와서 영화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면 해요.” 이들의 땀방울에 정당한 결실이 맺어지기를 기대한다.
“노래로 드라마를 이해하는 게 뮤지컬이다”
뮤지컬 <댄서의 순정> 주봉석 제작 프로듀서 인터뷰
영화를 제작하면서 동시에 뮤지컬화를 생각한 건가?
영화 기획 당시 뮤지컬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 5월 말부터 뮤지컬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일단 컬처캡미디어는 영화제작사이기 때문에 뮤지컬 쪽 인력이 없었다. 그래서 논의 이후 대표가 뮤지컬 프로덕션을 찾고 있었는데 딱히 찾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9월부터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작가가 각색작업을 시작했다.
뮤지컬화가 어울린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댄서의 순정>은 댄스 스포츠를 소재로 했던 영화이고 댄스 스포츠 자체가 매력적인 춤이다. 굉장히 화려하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도 충분히 볼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가 간단하다.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드라마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렇다면 댄스 스포츠를 실제로 하는 분들이 많이 캐스팅됐나?
오디션 때 댄스 스포츠 쪽으로 많이 공고를 보냈는데 사실 댄스 스포츠만 잘한다고 뽑을 수가 없더라. 앙상블 쪽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노래도 잘해야하고 뮤지컬 전체의 안무에 대한 감각도 있어야 되고 연기도 물론 돼야 한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댄스 스포츠 선수분들은 참여를 거의 못 하게 됐다. 뮤지컬 배우들이 댄스 스포츠 안무가에게 1월부터 배우고 있다. 뮤지컬 안무가는 또 따로 있다.
캐릭터가 달라진 부분이 있나?
일단 주인공이 달라지고 뮤지컬인 만큼 캐릭터에 변화가 있다. 채린 역할은 가수이자 연기자인 유진과 뮤지컬배우 양소민 씨가, 영새 역할은 최원철, 최성원 씨가 맡았다. 영화에서 채린은 캐릭터가 굉장히 명확한데 영새가 조금 어중간해서 그 부분을 좀 살리고 악역인 현수도 좀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에 이름만 등장하는 영새의 옛 연인 세영이 뮤지컬에서는 실제로 등장한다.
제작하는 입장에서 목표가 뭔가?
영화 팬들은 드라마를 본다. 뮤지컬 팬들은 노래를 듣는다. 그 두 가지가 다 충족되면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사를 가사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가능한 대사를 노래로 풀자. 함축적인 가사로 노래해서 관객이 드라마를 따라갈 수 있다면 성공이다. 그게 뮤지컬이다.
사진 김수홍
문성원 기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